최근 피아노와 피아노 음악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이 시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에게도 관심이 갔다.
그 중에서 백발의 긴 머리를 하고 피아니스트 치고는 소박한 차림을 한 할머니 연주자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궁금했다. 파고들수록 대단한 피아니스트였다. 국내에 번역된 평전도 읽었다. 아르헤리치가 어릴 때부터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연주자들이 책에 등장했다. 한 시대의 클래식 연주계를 주름 잡은 사람들이 다 나오는 것 같았다. 유튜브를 통해 그들의 연주를 찾아보다가 이 'Bloody Daughter'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발견했다.
2012년도 작품인 이 다큐멘터리는 놀랍게도 유튜브에 전편이 올라와 있다. 우리말 자막은 없고 영어로 된 나레이션과 영어 자막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르타의 막내 딸 스테파니 아르헤리치가 촬영하고 연출한 작품이다. 딸이 아니었으면 나오지 못했을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모습들이 많이 등장한다. 위대한 예술가로써의 모습 뿐만 아니라 어머니, 인간으로써 그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미 거장인 피아니스트인데도 여전히 무대에 나가기 직전까지 긴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 같은 곡을 수십 년간 수도 없이 연주해도 매번 다른 발견을 한다는 인터뷰도 기억에 남는다.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슈만에 대해 얘기할 때는 마치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을 숭배하듯이 애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20대 초반 쇼팽 콩쿠르 우승 전에 중국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딸 리다 첸 이야기, 영화를 연출한 스테파니 아르헤리치의 친부 이야기도 흥미롭다. 첫째 딸은 낳자 마자 아르헤리치와 고작 몇 달 밖에 같이 살지 못했고 아이의 친부에게 양육권을 빼앗겼다. 훗날 17살이 된 리다가 엄마를 찾아오고 나서야 엄마와 딸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유일하게 직접 키우지 않은 딸만 엄마를 이어 음악을 한다. 막내 딸 스테파니는 생부인 스티븐 코바세비치가 공문서 상의 친부로 기재되어 있지 않아 바로잡으려 애쓴다. 마르타와 스티븐이 동거한 상태에서 스테파니가 태어났고 곧 헤어졌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가족은 상처와 굴곡이 있고 이상적이거나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후반부 세 딸들과 공원에 앉아 매니큐어를 바르는 장면은 모계 사회의 한 장면 같이 훈훈하다. 그리고 마르타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딸에게 얘기하는 장면은 그것 자체로 감동적이다.
음악이 반드시 음악 자체에서만 감동이 오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의 삶과 연주하는 사람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때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음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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