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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아침의 해프닝 - 과도한 코 풀기가 빚어낸 소동

by 가늘고길게 2022. 5. 18.

아침에 겪은 일이 너무도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아서 기록해 보고자 한다.

여느 날처럼 힘들게 아침에 눈을 떴다.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 밥상을 차리고 식구들이 밥을 먹었다.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남편이 화장실로 들어가 씻는 것을 확인한 뒤 나도 외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빨리 해라, 빨리 해라'라고 아이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남편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 딸들과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중학생 큰 아이가 지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흘렀다. 왜 아침 시간은 더 빨리 흐르는지. 매일마다 겪은 일상이었다.

한참만에 남편이 화장실에서 슬쩍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짝 열린 화장실 문을 들여다 보았다. 세상에나. 욕조와 세면대, 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었다. 마치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처럼 글자 그대로 유혈이 낭자했다. 아이들이 보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찝찝했지만 아이들은 양치도 못한 채 등교했다. 

아이들이 집을 나가고 나서야 남편은 수건을 코에 틀어막고 화장실에서 나와 침대에 누웠다. 그제서야 제대로 본 화장실은 더 가관이었다. 예사로운 코피가 아니었다. 심지어 혈액에 덩어리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대충 화장실을 샤워기로 수습하고 남편을 끌고 동네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다행히 응급실에 다 왔을 때 쯤 코피는 멈춰있었다. 응급실에서는 피로에 찌든 의사가 코피가 멈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의사가 무책임하다 싶었는데 진료비를 안 받아서 그나마 양심적인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출근하겠다는 남편을 다그쳐서 동네 이비인후과로 갔다. 처음 가는 병원이었는데 원장이 매우 친절하게 코피의 원인을 잘 설명해 주었다. 코를 세게 풀어서 콧 속의 동맥이 터진 것이란다. 그래서 피가 솟구쳤던 것이고. 일주일에 두 세명은 비슷한 증세로 내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흔한 질병 같았다. 다행이었다. 콧 속의 찢어진 혈관을 봉합해야 하는데 그 병원에서는 장비가 없다고 했다. 추천을 받아 목동의 큰 병원에서 혈관을 봉합하고 나오니 그제야 헛웃음이 나왔다.

오전 몇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큰 병이면 어떻게 하나, 지금 들어둔 보험이 약관이 어떻더라, 나 다시 취업을 해야겠지...등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 버렸다. 남편과 나의 나이가 들어가니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의 시뮬레이션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이어졌다.

남편이 다시 회사로 떠나고 나는 평정을 되찾아 오전의 일을 복기하고 있다. 다시 일상을 되찾은 것에 감사한다.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평화로운 우리의 일상 곁에 항상 바싹 붙어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이가 된 나를 발견하게 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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