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2008년부터 약 5-6년까지는 나의 영화적 암흑기였다.
일을 그만두고 임신, 출산, 육아를 차례로 겪으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과 욕구는 서서히 퇴화되었다.
이 시기를 따라 잡기 위해 가끔 그 때 놓친 영화를 보게 되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도 그 중 하나였다.
그의 데뷔작 <원더플 라이프>를 우연히 극장에서 보고 <아무도 모른다>의 섬특함에 어느 정도 반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를 사로 잡았다.
엄마와 딸이 툭툭 잡담을 내뱉으며 채소를 다듬고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정겨웠다.
그러다 둘의 잡담이 곧이어 등장할 가족들에 대한 은밀한 소개로 이어질 때(료타가 과부와 결혼한 사실을 얘기할 때)
'아, 이 영화...정말 재미있겠다.'라는 확신이 생겼고 그 확신은 들어맞았다.
사실 이 영화에서 굳이 상업적으로 뽑아낼 스토리를 찾자면, 10년 전 바다에 빠진 아이를 구하다 목숨을 잃은 큰 아들의
기일마다 큰 아들이 살려낸 아이(현재는 20대 초반의 청년)를 초대하는 가족이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었을, 앞길이 창창했던 큰 아들이 살려낸 사람이 고작 직업도 변변찮고 비만에 지저분하기까지 한 보잘것 없는 청년이라는
사실에 분개한다. 다음 기일부터는 그 청년을 부르지 말자고 하는 료타(작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1년에 한 번이라도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와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아니나 다를까 영화를 다 보고 우리 나라에서 개봉했을 적에 이 영화를 소개한 시놉시스를 찾아보았다.
딱 저 부분만 골라서 마치 가족의 미스터리가 있는 양 소개해 놓았더라. 마케터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소재와 관계를 이렇게 담담하고 유려하게 표현한 작품이 또 있었나 싶다.
소박하되 상투적이지 않고 익숙한데 오글거리지 않은 가족 영화다.
두 모자가 걸어 올라가는 길, 또 내려가는 길. 아이들이 걷는 길과 바닷가를 걷는 삼대 등 걷는 장면이 많은데,
어느 한 장면도 허투르지 않고 잘 짜여져 있었다.
보면서 나와 돌이킬 수 없는 인연의 강을 건너버린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강은 다시 건너오기 힘들것 같다.